하프마라톤까지 4주가 남았습니다. 저는 21키로를 뛸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난주 일요일에는 16키로를 뛰었습니다. 쉬지 않고 뛴 가장 긴 거리입니다. 거리가 늘어날수록 걱정이 앞서기도 하지만, 동시에 할 수 있을것 같은 낙관이 생기기도 합니다. 조금씩 컴포트존을 늘려가는 감각에 생각이 차분해지기도 합니다. 16키로를 뛰었으니 5키로 정도는 더 뛸 수 있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에어팟 프로를 샀습니다. 이제 NRC를 켜면 코치의 목소리를 맑게 들을 수 있습니다. 5개월만에 처음으로 음악을 들으며 달립니다. Jay-Z의 99 Problems은 ‘If you’re havin’ girl problems, I feel bad for you, son. I got 99 problems, but a bitch ain’t one’라는 가사를 반복합니다. 무엇에도 불만가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제껏 달려보지 않은 먼 거리를 시도할 때마다 새로운 길에 다다릅니다. 이촌을 넘어 계속 달렸더니 여의도가 나왔고 마포에 도착합니다. 가는 길에 포도당 캔디를 하나씩 까먹었습니다. 함께 가져온 스니커즈를 먹고 싶었지만, 달리면서 어떻게 먹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아미노산 젤리를 사람들이 왜 먹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물론 지금의 저에게는 필요가 없습니다.
코치가 하는 말들에 힘을 받아 달립니다. 이 날은 ‘I believe in you. Even if you don’t believe in yourself, I do. That’s on my job description’ 이라는 말이 남았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무조건적인 응원이라는 말을 냉소적으로 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겁이 나서 그랬습니다. 그런 사랑은 없다고, 그런 응원은 없다고 냉소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 동거인을 만났습니다. 그런건 있는 것 같습니다.
13키로 즈음부터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곧 끝나간다는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더니 바로 그랬습니다. 처음 가볍게 달리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편안했고, 반환점을 돌 때에도 즐거웠는데, 이제 곧 끝난다고 생각하니 달리고 있는 내가 미련하게 느껴집니다. 눈 딱 감고 눈 딱 뜨면 끝나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처음과 끝은 중간을 채우지 않으면 없습니다. 그러니까 변함 없이 달립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6키로를 완주했습니다. 한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발가락 앞쪽이 아픕니다. 발바닥도 아픕니다. 마라톤을 달린 사람들의 후기를 보며 어떻게 하면 발이 찢어지고, 발톱 몇 개가 빠질 수 있는지 몰랐는데, 실제로 아프고나니 정말로 그럴것 같아 겁이 납니다.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고 지치지 않고 평안한 모습으로 달릴 수 있을까요. 환상입니다. 할 수 있는 일 안에서만 있고 싶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 과거의 마음입니다. 하프를 달리기로 했으니, 하프를 달려봅니다. 해 본 적 없는 일을 하러 갑니다. 4주가 남았습니다. 완주를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발톱이 빠져도 괜찮습니다. 해보고 싶은 일을 하는 나를 응원합니다. 여기에 무조건적인 응원이 있습니다.